2025년 상반기,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에서는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영화 거장들의 신작이 공개되며 국제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들 작품은 단지 영화적 성취를 넘어서 감독 개인의 철학과 시대 담론을 함축하고 있어, 예술성과 사회적 메시지 면에서 모두 주목받았습니다. 아래에서는 2025년 기준 이 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거장 감독들의 대표 신작과 그 특징을 정리합니다.
칸 영화제: 라스 폰 트리에의 귀환 - <분노의 침묵>
2025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가장 강한 반응을 얻은 작품 중 하나는 라스 폰 트리에의 <분노의 침묵>입니다. 전작 <멜랑콜리아>와 <도그빌>에서 인간 심리의 극단을 탐색한 그가 이번에는 침묵을 매개로 한 사회적 폭력을 다뤘습니다.
영화는 한 유럽 마을에서 일어난 미해결 실종 사건을 다루며, 마을 전체가 ‘아무도 말하지 않음’으로 공모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연출로 풀어냅니다. 대사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장면 구성은 거의 연극적인 무대미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도그빌>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이번에는 더 미니멀하고 더 불편합니다.
칸 현지 언론에서는 “예술적 완성도는 높지만, 대중성은 철저히 배제된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폰 트리에가 정신 질환 투병 이후 더욱 날카로워졌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수상은 놓쳤지만, 감독의 복귀 자체만으로도 칸의 예술적 위상을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베니스 영화제: 파올로 소렌티노의 회고적 대서사 - <광장의 기억>
202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광장의 기억>이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레이트 뷰티>, <신의 손> 등을 통해 개인적이고 시적인 영상미를 선보였던 소렌티노는 이번 영화에서 1970~80년대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가족과 정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감독 본인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담긴 이 영화는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참여했던 노동운동과 정당 갈등을 스토리의 축으로 삼아, 도시의 공간과 개인의 내면을 병렬적으로 펼쳐냅니다. 특히 이탈리아 정치사 속에서 잊힌 장소들을 클로즈업으로 다룬 장면들은 ‘공간이 기억을 보존한다’는 소렌티노 특유의 미학을 다시 확인하게 만듭니다.
촬영은 루카 비가치 감독과 협업하여 특유의 정적인 롱테이크를 유지했고, 음악은 1970년대 이탈리아 클래식과 민속음악을 결합한 새로운 사운드 디자인을 시도했습니다. 베니스 비평가상과 촬영상 2관왕을 수상하며 “감성적 회고와 정치적 메시지의 아름다운 접점”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클레어 드니의 사회적 SF - <공기의 무게>
2025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프랑스 거장 클레어 드니가 선보인 <공기의 무게>가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드니는 전작 <하이 라이프>에서 이미 SF적 요소를 실험한 바 있으며, 이번 작품은 ‘사회적 공기’를 메타포 삼아 계층 격차와 환경문제를 결합한 일종의 사회 SF입니다.
영화는 미래의 유럽을 배경으로, 인공 산소를 유료로 공급받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숨 쉬는 공기조차 계층에 따라 차별화되는 이 디스토피아적 설정은 실제 기후 위기와 빈곤 격차 문제를 날카롭게 반영합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아델 에넬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기술자 역을 맡아, 시스템을 해킹해 ‘무상 공기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인물로 열연했으며, 그 연기력은 비평가들로부터 “올해의 여성 연기”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드니 특유의 낮은 채도, 느린 호흡, 시적 내레이션이 결합되며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